Sweety Safety, 2018

망령이 된 얼굴들 : 황예지의 사진과 충돌하는 감각에 대한 몸의 기록

김예솔비


0 칼데라(火口)

지리멸렬한 여러 번의 착륙 시도 끝에 불시착. 활주로는 전소했다.
대지의 색은 창백하다. 강성을 잃고 액체처럼 쏟아지는 토양. 망한 지상에서 유일하게 협조적인 것은 분지의 침식. 칼데라는 행성의 엔딩을 장식하러 태어났다. 청록색 액체 위로 한 무리의 수증기가 부드럽게 이동한다. 질식에 임박했을 때 공표되는 안내 음성. 그것은 유독물질입니다. 화구에서 떨어지십시오. 사진가는 질식에 용이한 편도선을 가졌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위험하지 않나요. 눈썹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그녀가 대답한다. “나는 이곳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얼굴은 거기서 막 떠나온 사람의 것 같았다. 


0 포옹하는 배제

여행자의 정동은 지속에의 믿음을 깨뜨리는 데에 있을 것. 낯선 도시에 떨어진 이방인은 스치는 모든 것들이 지속과 무관하다는 것에 놀란다. 타지에서 조우하는 현장들과 여행자는 임시적으로 묶어질 것이며, 부담 없는 결합은 헐거워서 쉽게 해제된다. 여행자의 이동은 무수한 임시 결합-해제의 반복과 변주로 구성된다. 한편 여행자이면서 사진가인 황예지의 수행은 프레임이라는 밀실의 내부를 현시하는 동시에 프레임 이면의 것들을 거기 그 자리에 두고 오는 작업이다. 그녀의 작업에서 포용과 배제는 즉물적으로 이루어진다. 스스로의 추동을 믿고 날 것의 감각으로 축조된 프레임 안에서, 배제된 것들은 버려지거나 삭제된 것들이 아니다. 어떤 것들은 선명하지 않은 채 남아 있길 바라는 사진가의 애정, 여행자의 멜랑콜리에 가깝다. 그러므로 황예지가 사진을 찍는 행위는 ‘끌어안는 배제’라고 명명될 수 있을 것이다.

여행은 황예지가 Safety를 Sweety로 잘못 읽은, 사소하지만 필연적인 오독으로부터 시작된다. 언어의 변모를 가능케 한 무수한 경위 중 한 가지를 가정해보자. 물론 이것은 픽션이다. 그녀가 Safety라는 단어를 보고 위험을 감지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황예지는 끌어안는 배제에 능한 사람이고, 그래서 어쩌면 안전이라는 단어가 언어로 발화되는 순간 그 찰나에 단어는 안전이라는 세계의 이면-위험의 의미까지 함께 내포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내 그녀는 위험한 것들의 매혹을 떠올린다. 이를테면 자기혐오에의 유혹이나 질식하기 쉬운 신체 같은 것들을. 안전을 당부하는 문구는 위험을 경유하여 달고 안온한 결론에 종착한다. 스스로를 미워하며 사는 건 너무 달아.1 Sweety. 제 몸이 굴절된 채 당도한 언어. 오독의 순간은 비릿한 맛이었을까.

차라리 매일이 불시착이라고 말할 사람. 임시적인 것들에서 고향의 냄새를 맡는 사진가. 황예지의 사진에서 눈이 사라졌다. 서른 두 장의 사진들 가운데 정념을 가장 강렬하게 포획하고 있는 것은 그녀의 셀프 포트레이트이다. 사진 속에서 눈과 눈썹은 사라지고, 소멸 뒤의 표면은 얼얼하다.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살갗을 할퀴고 떠난 빛의 궤적. 황예지가 스스로의 얼굴에서 지워낸 것은 필시 아름다웠을 테지만, 부재에 애상감을 부여하고 아름다움의 족적을 추적하는 일은 사진의 역량을 오인하고 나아가 훼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녀의 사진을 보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직시하는 것이다. 사진을 마주했을 때 둔탁하게 울리는 충격을 받아내면서. 이목구비가 탈주한 정경을 바라보며 당시의 충돌에 대해, 회상한다. 내 안의 무언가가 무너져내렸다고.


0 틈입을 매개하는 구멍

로라 멀비는 『시각적 쾌락과 네러티브 영화』에서 시선의 에로티시즘이 여성성을 코드화하는 방식, 영화의 환영이 여성성의 재현에 의탁해 온 관행들을 고발한다. 그녀는 이렇게 쓴다. “흔히 쾌락이나 아름다움을 분석하는 것은 그것을 파괴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는데, 바로 그것이 이 글이 의도하는 바이다.”2 그리고 지금, 여기서, 결별을 장전 중인 한 명의 사진가. 황예지는 미적인 것(으로 여겨져 온 것들)의 파괴를 통해 통상적인 기대들을 가뿐히 배반하면서 결별을 고하려 하고 있다. 과거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뒤로 하고 떠나는 데서 오는 전율. 여행자는 전진한다. 고향의 인력을 견디고, 달려가 안기고픈 마음을 지우면서, 척력을 발생시키는 발걸음. 투쟁이다. 당신이 보려고 하는 모든 것들을 나는 무기로 만들어 버릴 작정입니다.

황예지의 사진들 안에서 이목구비가 소거되는 방식은 죽음의 형상과 유사하다. 사진 속 인물들은 파편화된 신체로 암시되거나 머리에 천을 뒤집어쓰고 유령의 환영처럼 나타난다. 혹은 포장된 채로 운반을 기다리는 시체. 그녀는 임시로 머무를 도시의 도처에 망령을 심어 놓는다. 하지만 이러한 메멘토-모리의 질료들이 단순히 부재나 상실의 애상감을 체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그녀가 찍은 여성의 초상에서 얼굴들은 왜 가려져 있으며 파편이나 흔적으로만 제시되고 있는 걸까. 여행의 출발점에서 일어난 오독을 다시 한번 상기해보자. 혼동된 두 단어 사이의 간극을. 우리는 하나의 가설을 세울 순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정은 영원한 미지일 뿐이다. 지각의 영역에서 그것은 비어 있다. 마찬가지로 사라진 얼굴 위에 형상의 가설들을 세워보지만,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낡은 욕망이 빠져나간 자리. 입구이자 출구인 구멍이다.

사진을 보는 이가 느꼈을 박탈감은 틈새가 벌어진 돌, 중앙이 텅 비어 버린 백인 남자의 두상을 만났을 때 강화되고, 이는 구멍의 감각을 환기한다. 구멍은 내부와 외부를 매개하는 틈이자 공간의 확장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미지가 구현하는 시각적 쾌락 안에서 여성성은 철저하게 공간이 결핍된 채 재현되었다. 특히 여성들의 사진은 성적 활기를 깨우는 핀업 걸(pin-up girl)처럼 납작하게 벽에 붙어 전시되어 왔다. 로라 멀비에 의하면 스크린에서 대상화된 여성성이 평면적으로 기능하는 반면, 네러티브의 주체인 남성들은 공간에 대한 통제력을 가진 초자아로서 내면화된다. 그들은 스크린의 한계를 뛰어넘어 능동적으로 움직인다. 따라서 황예지가 축조해낸 구멍은 공간의 3차원을 회복하려는 결단이다. 그동안 여성의 성적인 매력은 블랙홀이나 현기증(vertigo)3 등으로 묘사되어 왔는데, 황예지의 사진들에 나타나는 구멍은 모든 것을 흡입하는 블랙홀이나 방출구로서의 화이트홀이 되기를 모두 부정한다. 그것은 틈입을 매개하는 가능성만 남겨진 구멍, 차라리 웜홀이다. 해석되거나 정복될 수 없는, 영원한 가설만이 가능한 지각 이면의 영역이다. (웜홀을 통한 우주 여행은 수학적으로만 가능하다). 


0 나는 나를 파멸할 권리가 있다 4

진공과 과호흡, 죽어 있는 것과 살아있는 것, 상승하는 물줄기와 하강을 기다리는 손. 이미지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시각적 낙차는 예민한 편도선을 가진 사진가가 고안해낸 호흡법이다. 그녀는 스스로 침식하거나 범람하려는 사진들 사이에서 균형을 타진한다. 그리고 대비되는 성질들의 충돌 사이에서 흐르는 아우라로 숨 쉬는 사진가는, 우리를 질식으로부터 구원하러 왔다. ‘질식에 임박했을 때 공표되는 안내 음성’으로. 사진에서 반복되는 선명한 레드-선홍빛 혈흔이나 붉은 조명은 구원자의 표상인 걸까. 혹은 그저 그녀가 저지른 파괴에 대한 소회가 적색의 강렬함으로 은유된 것일지도. 그것도 아니라면 무너진 것들 뒤에서 우리가 함께 버티고 견뎌야 할 시간들을 경고하는 중일 테다.

임시 풍경들을 뒤로 하고 지속의 세계로 돌아온 그녀는 이제 임시적인 것들 안에서 지속 가능한 결별과 연대를 고민한다. 그녀는 즉물적인 몸의 감각으로 피사체를 대하지만, 우연히 획득된 것처럼 보이는 장면들은 사실 황예지가 끈질기게 탐구하고 축적해온 몸의 언어들이다. 황예지는 누군가의 몸이 되어본 적이 있기라도 한 듯이 타인을 쥐는 악력에 대해 해박하다. 그녀의 품 안에서 흘러넘치면서 소멸 중인 생(生)들. 스스로 파멸할 권리들을 존중하지만서도 결코 그것들이 홀로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라는 결단. 황예지는 망령들을 끌어안는다. 아베 마리아. 아베 마리아.


1 뮤지션 김사월의 노래 <달아>에서 가사 일부를 차용했다.

2 로라 멀비, 『시각적 쾌락과 네러티브 영화』, 윤난지 역.

3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현기증>(1958)에서 여자 주인공 주디(Judy)는 남자 주인공 스카티(Scottie)의 관음적 대상이자 물신적 매혹으로 재현된다.

4 황예지와의 서신교환에서 그녀가 보내 온 문장. 프랑수아즈 사강이 한 말이다. 편지에서 그녀는 첨언한다.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누르려고 또 내 몸에는 잉크가 묻어났다’고.